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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讀後感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알랭 드 보통): 보통의 일상을 위한 보통의 제언

by perspector 2018. 5. 26.

알랭 드 보통이 스물셋의 나이에 쓴 그의 첫 작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정영목 옮김, 청미래)는 주인공이 그의 낭만적 상대(클로이)를 이상화idealization하는 장면으로 서두를 뗀다. 사랑이 시작되면 (쌍방이건 일방이건) 상대를 향한 감정의 그래프가 펼쳐진다. 감정의 곡선은 이상화를 등에 업고 우상향하며 이내 정점에 도달한다. 나머지 문제는, 그 후 펼쳐질 미끄럼틀의 구성 작업에 달렸다. 급경사는 임박한 파국의 복선이고, 완만한 경도는 관계의 연장을 내포한다. 이 소설을 찬찬히 읽고 있자면, 사랑의 생성과 소멸이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포개짐을 느낀다. 모든 사랑은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다.


(영화 <500일의 썸머>는 위 도서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보인다[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글쓴이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 저 책이 등장한다던데, 팩트체크한 사항은 아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알랭 드 보통, 김한영 옮김, 은행나무, 2016)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등장하는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던) 남자 주인공의 후일담이다. 저자는 대놓고 후속편임을 밝히진 않지만 몇몇 문장에 임무를 하달하여 대놓고 그것을 암시한다. 저자는 소설의 주인공인 라비와 커스틴을 무대에 올려 낭만주의, 일상, 섹스, 양육, 외도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낸다. 결론은 간단하다. 사랑의 열차에 올랐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연인 앞엔 지난하고도 진절머리 나는 수많은 과제가 우후죽순 생겨난다. 저자는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28)



관계의 깊이


관계 맺음의 형태는 다양하다. (사랑에 한정하면) 거칠게 연애·동거·결혼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동거·결혼은 연애의 부분집합이지만 용례를 감안하였다). 저 세 가지 형식에 우열은 없다. 기성세대는 두말할 나위 없이 결혼을 최상위에 둘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자기 성향과 상황에 맞게 (연애의 방식을) 선택하면 될 일이지 무엇이 가치 있다고 못 박는 것은 어리석다.


이러한 표현은 가능하다. 연애보다는 동거가, 동거보다는 결혼이, 상대를 깊이 알 수 있는 관계의 형식이라고 말이다. (좋든 싫든) 두 사람 간 생활의 공유지가 가장 드넓을 수밖에 없는 것은 결혼이다. 일상을 영위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며, 서로의 가족을 대하며, 불거진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은 상대의 진면목(장·단점과 심지어 광기까지)과 마주한다. 상대의 사랑스러운 구석부터 지리멸렬한 밑바닥까지 패키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연인의 민얼굴을 보고 싶은가? 결혼이란 바다에 사랑이란 범선을 띄워 보라. 효험을 보장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결혼은 라비와 커스틴에게 서로의 성격을 각별히 자세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성인이 된 후로 그 누구도 이토록 한정된 장소와 다양하고도 까다로운 조건―늦은 밤과 멍한 아침에, 업무로 인해 낙담하고 낭패할 때, 친구들에게 실망할 때, 생활 용품들이 없어져 화가 날 때―아래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행동을 조사하고자 이만큼 시간을 들인 적이 없다. (132)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비단 사랑만이, 결혼을 결행하는 촉매 역할을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그처럼 단일하게 구성되고 움직이지 않는다.


다소 부끄럽지만 결혼의 매력은 혼자 산다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로 귀결된다. 이는 꼭 우리 개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사회 전체가 독신 생활을 최대한 성가시고 우울하게 만들기로 작정한 듯하다. (···)

52번의 일요일을 내리 혼자 보내면 개인의 신중함이 교란될 수 있다. 외로움은 무익한 성급함을 촉발하거나, 잠재적 배우자에 대한 의심과 양면가치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 어떤 관계든 그 성공은 연인이 함께할 때 얼마나 행복한가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혼자인 것에 대해 각자가 얼마나 걱정하는가에 따라서도 결정된다. (60~61)



낭만주의


당신은 낭만주의자인가? 질문을 수정하자. 당신은 자유사상가libertin인가? 만일 당신이 자유사상가라면 사랑과 섹스를 구분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연인 이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자유사상가는 죄책감을 비롯한 부정적 감정으로써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는다. 한 사람과만 관계하라는 억압(?)은 부당한 것이고, 그들에게 다른 사람과의 섹스는 체스 경기를 함께 즐기는 일과 동등하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자유연애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범한(?) 그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신념의 강도는 상이하겠으나) 낭만주의에 복무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섹스에 사랑을 결부하며 일처일부제를 옹호한다. 과거엔 조건과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에야 마침내 결혼이 성사되었다. 열띤 감정은 병적인 증상으로 치부했다. 오늘날 낭만주의자들은 조건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속물이란 오명을 덧씌운다. 결혼의 기저에 사랑이 자리해야 함은 그들에겐 상식이다. 그들은 사랑이 싹틀 때 분비되는 호르몬의 흔적을 한사코 찾아 헤맨다. 기쁨과 희열, 그리고 완성이라 여겼던 고귀한 감정이 희미해지는 데에 불안을 호소하며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절감한다. 낭만주의는 사랑을 추동하는 동시에 갖은 폐단을 잉태한다.


일상은 드라마적 요소로만 채색되어 있지 않다. 라비는 창문을 굳게 닫은 채 취침하기를 원하며 커스틴은 공기의 드나듦에 신경 쓴다. 커스틴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왕왕 소환함으로써(저자가 감정전이라고 부른 행위) 라비를 곤경에 빠뜨린다(이에 관해선 라비도 무결하진 않다). 라비는 본인 부주의로 휴대전화를 분실했음에도 불행의 모든 원인을 커스틴에게 돌린다.


부부는 (보기에) 중대성을 띤 일에서부터 때로 하찮아 보이는 일까지 생활의 여러 국면에서 부딪치게 마련이다. 낭만주의에 포섭된 사람이라면 일련의 대목에서 좌절할지 모른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운명적 연인의 낯선(은폐됐던) 모습에 화들짝 놀랄 것이며, 자신의 비루한 성정을 재차 확인하며 침울해할 것이다.


우리가 낭만주의에 빠지는 데에는 예술도 한몫을 담당한다. 예술의 단골 소재를 줄 세워 보면, 예술 작품이 얼마나 낭만주의에 기초한 운명론에 빚을 지고 있는지 대번 알 수 있다. 음악을 들어 봐도, 소설을 읽어도, 드라마를 시청해도, 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잡다한(것으로 여겨지는) 갈등은 이야기의 재료로 채택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례를 들어 볼까. 가수 김범수가 군 복무 후 발매한 정규 앨범 6집엔 <님아>라는 곡이 수록돼 있다. 오랜 기간 사귀었으며, 전역할 때까지 기다려준 연인에게 바치는 가수의 찬가이다. 노랫말도 직접 썼다. 후에 가수는 <님아>에 모티브를 제공한 대상과 결별한다. 그에 대한 감상을 노래한 곡이 <끝사랑>이다. <끝사랑>의 가사를 들여다보면, 헤어진 연인이 자신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임을 명토 박고 있다. 어떤 이에겐 감동적 스토리일지라도 혹자는 텍스트에 묻은 진부함과 휘발성에 손사래 칠 것이다(대관절 실연 후 사랑, 끝, 타령이라니!). 수많은 예술 작품은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스펙터클을 모태로 하며, 주제로부터 시시해 보이는 범인의 생활상을 누락시킨 결과, 보통의 생활 요소는 실제 시시한 것으로 전락하곤 한다.


일상적 난제를 가진 관계는 이상하고 득 될 것 없이 도외시되는 주제로만 남는다. 자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양극단, 즉 더없이 행복한 관계 아니면 살인적인 파국이다. (···)

권위 있는 책들을 보면 이 저자는 어떻게 우리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 수 있었을까 하며 위안과 감사를 느끼고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견딜 만한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감각은 사회와 예술의 침묵에 약해지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히 대단히 드물고 기행적인 형태의 것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싸움들이 기본적으로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드물고 근본적인 실수를 범한 징표라고 믿게 된다. (81~82)


예술가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빨래의 당번을 두고 남편(혹은 아내)과 죽기 살기로 치고받은 후에, 저자가 지칭하는 ‘일상적 난제’를 다룬 드라마를 보고 싶은 이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콘텐츠 생산자(이자 소비자)는 소비자의 흥미에 얹혀살 수밖에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관계를 조탁해 나가는 작품(있기는 한가)보다는 낭만주의의 초입이나 막바지를 조명하는 예술 작품이 양산되는 까닭이다.



육아, 섹스 그리고 외도


부부 사이에 세상에 둘도 없는 어여쁜 아기가 끼어들지 않더라도 그들은 (어렵지 않게) 서먹해질 수 있다. 하물며 아이의 존재는 부부가 권태에 빠질 공산을 한없이 부추긴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신의 아이를 크나큰 사랑과 친절과 인자함으로 대할 것이다. 밖에서 언짢은 일을 겪었을지라도 가면을 뒤집어쓰고서 단어 하나 허투루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을 위해서다. (155)


마음도 한정된 자원이며 낭비는 고갈을 재촉한다. 물리적·심리적 에너지를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한 후에 예전처럼 배우자를 돌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부루퉁한 말투는 다툼의 씨앗이 된다. 망각하고 살지만, 우리는 어른이란 외피를 두른 아이다. 유년기에 부모에게서 받은 무조건에 가까운 사랑을 오늘날 자신의 연인에게도 (이해라는 형식을 빌려)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린애 같은 면에 조금 더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면 더욱 멋질 것이다. (163)


라비와 커스틴 부부는 슬하에 첫째 에스터(딸)와 막내 윌리엄(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정신적 부부관계뿐 아니라 신체적 부부관계 역시 예전 같지 않다.


하루가 끝나면 대개 커스틴은 라비가 만지는 것조차 꺼려 한다. 더 이상 그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더 내어주는 모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이 더 많은 요구로 더 흩어지게 놔두기보다는 그녀 자신을 단단하고 조용히 붙들고 있고 싶다. (···) 자기 자신의 생각을 다시 알 기회를 충분히 얻기 전까지는 그녀 자신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다. (185)


매체를 통해 섹스리스라는 단어를 종종 접한다. (결과치보다 도출 과정이 더 궁금한) 기간에 따른 연령별 성관계 횟수에 관한 통계도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라비를 거부하는 커스틴의 행동은 사랑이 소멸되는 징후가 아니다. 저러한 단어나 통계치는 라비로 하여금 커스틴에 대한 이해심을 깎아내리는 데 일조하며 자신의 결혼 생활이 망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든든한 후원군이다.


이제야 소개하는 게 좀 민망하지만, 커스틴은 스코틀랜드인인 측량사이고, 라비는 중동 출신(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한)의 건축가이다. 어느 날 라비는 “도시 재생을 주제로 열리는 콘퍼런스(199)”에 참석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날아가고 (이쪽으로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그곳에서 로스앤젤레스에 기거하는 서른한 살의 여성 로런을 만나 정사를 나눈다. 라비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는 비교적 모범적 남편이자 아버지이다. 라비는 아내가 그를 안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가당치 않으나) 외도의 이유로 짐작하는 듯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쓴다. “자신만의 매력에 의구심을 품고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인지를 계속 알아내야만 하는 애처롭고도 불안정한 남자들이 어떤 위험한 짓을 벌이는가.(205)”


중년의 유혹자가 보이는 솔직함이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이다. (204)


라비는 커스틴에게 자신의 치졸한(?) 비행을 함구한다. 저자는 찬성론·반대론이란 소제목을 붙인 글로써 라비의 심리 상태를 묘사한다. 라비는 외도에 관한 찬성론자가 되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간통은 배신이라는 공고화된 주장을 논박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남편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 부러 과장한 것으로 보이는 커스틴의 한마디 말에, 별안간 그는 (외도) 반대론자로 전향하여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심의 눈초리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진퇴양난에 빠져 황망해하는 라비의 모습을 특유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저자의 필력을 체감하려면 본문을 읽어야만 한다.


베를린에서 그를 이끈 것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새롭지만 제한적으로 진입해 결혼 생활의 문제를 회피해보겠다는 갑작스런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깨닫게 되었듯이, 그런 희망은 허튼 감상에 불과했고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패배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잔인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238)



해결책


라비와 커스틴은 관계의 파멸을 담은 예고편이 그들에게 시시로 찾아듦을 인식한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심리 치료사인 페어베언 여사를 찾는다. 처음에 라비는 심리 치료에 오롯이 참여하지 못한다. 심리 치료라는 단어에 각인된 왠지 모를 거북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꾸준히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이따금 눈물을 흘린다. 부부는 일상을 영위하며, 페어베언 여사가 지금 그들의 상황을 보았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하는 대화를 나눈다.


사랑은 조사를 거부하는 본능이자 감정이라는 개념에 취해버린 세계에서 그들의 대화는 성숙함을 연구하는 작은 실험실처럼 느껴진다. 페어베언 여사의 진료실이 낡은 공동주택의 계단을 몇 층 올라가야 하는 곳에 틀어박혀 있다는 사실은 그 직업이 과소평가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녀는 라비와 커스틴도 이제 친숙해진 진리, 그러나 그들도 알고 있듯이 주변을 둘러싼 소음에 애석하게도 잃기 쉬운 진리의 옹호자이다. 사랑은 단순한 열정을 넘어 기술이라는 것 말이다. (262)


언젠가 밴드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김태원이 이처럼 말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사람이 50살에 아이를 낳는다면 양육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같은 맥락일까. 라비는 결혼한 지 16년이 되어서야 자신이 결혼할 준비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저자는 그 이유 아홉 가지를 제시한다.


①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278)”

②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280)”

③ “(···)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280)”

④ “(···) 커스틴이 까다로운 게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281)”

⑤ “(···)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281)”

⑥ “(···) 항상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282)”

⑦ “(···) 이제 (평온한 날에는) 행복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283)

⑧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283)”

⑨ “(···) 대부분의 러브스토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고,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랑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284)”



마치며


텔레비전에서 엄앵란, 신성일 부부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을 잠시 본 적 있다. 그들 부부의 사연에서 대체 무엇을 읽어 내라는 걸까? 제작 의도가 궁금했다. (물론 만남과 헤어짐의 자유는 오직 당사자들에게 있고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다.) 지금은 21세기이다. 가정을 고수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개인의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잘못된 선택을 한 연인이라면 깔끔하게 갈라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야 하느니라.’라는 해답으로만 귀결했다면 결코 완독하지 않았을 테다.


결혼 생활을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당장 헤어질 것을 종용하는 행태는 어떤가. 무조건 참고 살라는 대책 없는 조언만큼이나 위험해 보인다. 강바람 피하려다 태풍 만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은가. 어쭙잖은 조언자들은 당사자들의 삶을 깊이 알지 못한다. 관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직면한 문제가 개선 가능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주체는 당사자들뿐이다(실력 있는 심리 전문가와의 상담도 유용한 듯하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통해 본인이 혹 낭만주의에 속박되진 않았는지 점검해볼 것을 권고한다. 우리는 감수성의 가뭄을 위기로 간주하며 낭만주의는 그것을 해갈하는 일등 공신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본 게임은 그제야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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